아디오스 땅고(하동현)

등록일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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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오스 땅고

―Adios Tango

 

민둥산 등성이에 오렌지 빛 노을 꽃이 물들었다.

여의주(如意珠)처럼 빛나던 해를 대지는 힘차게 아래로 끌어당기며 잿빛 어둠을 끌어 모았다. 허허벌판의 가장자리쯤에 위치한 공항 활주로의 유도표지등이 켜졌다. 착륙을 시도한다는 기장의 멘트가 흘러나왔고 비행기는 고도를 한껏 낮췄다.

파커 만년필 뚜껑을 뽑자 펜 끝이 은색으로 빛나며 눈을 찌른다. 스물 셋에 뱃놈이 된 이후로, 새로이 마주쳐야 할 항구나 도시에 도착할 즈음이면 버릇처럼 비망록 같은 수첩에 간단한 소회를 남기고는 했다.

-아르헨티나 산 안토니오 오에스테(San Antonio oeste) 항구. 냉동운반선 파이오니어 7호에 승선, 200마일 밖 공해상(배타적 경제수역 바깥 어장)으로 나가 지정하는 그리스 선적 냉동운반선으로 옮겨 타고 본사 지시를 기다릴 것.

언제부터인가 비망록은 젊은 날의 열기나 감흥이 서서히 사라지고 무미건조한 일정표 같은 메모로 변해버렸다.

야간비행에서 혼자 개별램프를 밝히고 승무원에게 얻은 엽서에 혈기 넘치고 무모하던 젊은 뱃놈의 치기어린 각오 같은 것을 비장하게 적어 내릴 때, 수신인은 언제나 찢어지게 가난해 대학도 못가고 해병대에 말뚝 박은 어릴 적 불알친구였었다. 또 언제부터였을까. 정처 없는 뱃놈의 방랑생활에 주정뱅이 아버지를 대신해 연탄배달수레를 끌던, 어릴 적 그 친구와도 연락이 끊겨버렸다.

긴 비행에 뒷목이 뻐근하면서 엉덩이가 뒤틀리듯 아파왔다. 출발은 한 겨울이었지만 남반구는 후덥지근한 여름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에세이사(Ezeiza)공항에서 금테안경의 심사원은 ‘하역감독’이라는 입국목적은 이해하는 듯 했으나, 선박 슈퍼바이저(supervisor)라는 직업이 생소한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귀찮다는 표정으로 스탬프를 여권에 눌러 찍었다. 피식 웃으며 손칼로 자신의 턱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수염을 기른 텁석부리 내 모습이 여권 사진과 약간 다르게 보였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입국장에는 이웃 나라에서 벌어 진 배구시합에서 패하고 귀국한 선수들에게 계란과 휴지를 집어던지며 야유를 퍼붓는 소동이 있었다. 배구가 이러할진대 축구라면 어땠을까 짐작이 가는 한바탕 신명나는 살풀이 같은 난리였다.

다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비에드마(Viedma)공항에 도착하면 대리점에서 보낸 기사가 산 안토니오 오에스테까지 승용차로 에스코트하기로 했지만, 이 녀석은 나중에 들으니 화장실이 급했다며 십분도 더 지나 ‘세뇨르 하(미스터 하)’라 갈겨쓴 구겨진 판지를 들고 나타났다.

공항 내부에는 묵은 박하향이 배어있었다. 지도를 보니 삼백 킬로는 족히 될 법 한데 이놈은 ‘세르까(가깝다)’를 연발하며 두 시간이면 떡을 친단다.

녀석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범퍼가 일그러진 고물승용차에 올라타고 공항을 벗어나자 핸들 한 번 꺾을 필요 없는 직선도로가 아직 식지 않은 한낮의 열기를 토해내며 끝없이 뻗어있었다.

도착할 때까지 트럭 두 대와 마주쳤을 뿐이다. 한적한 도로에서 서로 마주치면, 반갑다는 표시로 이놈들은 경적을 울려대며 지그재그 운전에다 머리를 창밖으로 내밀고 삿대질 같은 손 인사를 했다. 앞창의 몇 군데 총알을 튕겨낸 것 같은 균열은 새들이 차의 속도를 피하지 못해 부딪히며 난 것이란다. 기사는 피우다 남긴 담배필터를 손가락으로 구겨 넣듯 유리의 균열을 메우며 히죽댔다.

새파란 나이에 벌써 딸을 셋이나 퍼질러 놓았다는, 웃음이 헤픈 개구쟁이 같은 표정의 이 친구는 고물승용차로 이런 하청을 받아 심부름으로 입에 풀칠이나 하며 먹고 산다 했다. 그제야 놈은 내가 누구인가를 물었다.

“까삐딴, 꼬레아노(한국인 선장이다).”

“오우, 까삐딴.”

내 답에 엄지를 세우더니 한 손으로 구식 카세트를 뒤져 ‘라 밤바(La bamba)’를 틀었다. 그리고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한국 중고차가 여러 면에서 경제적이라 열심히 뛰어 금년 내에 구입하리라는 기특한 말도 할 줄 안다. 경쾌한 음악에 속도감이 그저 그만이었다.

………(하략)…………………

 

□ 하동현, 2016년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소설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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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수록 문예지 : <해양과 문학>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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