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만선(김상순)

등록일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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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만선(金滿船)

 

바다를 떠난 바다사내가 있었다. 그는 시드니 항구에 生의 닻을 내려놓고,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가 예각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점포를 얻어서 육지에서의 삶을 영위했다. 로또와 신문 잡지 등을 팔면서 출렁이는 바다 그리면서 하루해를 보냈다.

시드니는 바다를 가슴에 안은 도시……. 바다사내 또한 두고 온 바다를 가슴에 안고 살았다. 노을이 유난히 고운 날은 턱을 괴고 바닷가에 앉아서 불콰한 얼굴로 노을 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를 가르고 싶은 욕구를 주체 못하여 눈을 살며시 감았다 뜨곤 했다.

비록 젊은 날의 항해일지는 가슴 깊이 접어두었지만 건듯 바람 한줄기에도 그때 그 바다가 출렁거리고 갈매기들이 관광객이 던져 주는 먹이에 구구 소리를 내며 점포 앞에 모여들 때는 지금도 바다 위에 떠 있는 행복을 느꼈다.

나이 들어 시작한 이국의 삶이 항상 그렇듯 불현듯 찾아오는 걷잡을 수 없는 지난날의 그리움에 휩싸일 때면 폭풍 속의 마스트처럼 꼿꼿한 마음 기둥 하나 가슴에 세워놓고 첫사랑의 바다를 그리며 살았다. 비록 시드니항의 해풍이 코 밑을 스칠지라도 이제 바다는 먼 바다가 되었고 범선은 바람 잃은 신세라면서.

 

김만산(金滿山)

5․60년대 대부분의 시골에 살던 사람들이 그렇듯 지독히 가난했던 김태수 씨는 아들을 낳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김만산(金滿山)이라 이름 지었다. 황금으로 산을 가득 채울 만큼 재물이 굴러 들어오라는 소원을 담아서.

“어느 날, 몸이 고단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꿈을 꾸니 말이다. 앞산에 보름달이 해처럼 훤하게 솟아오르지 않겠니. 순금빛 보름달이. 두 팔을 벌려 크기를 재는데 아 글쎄 손에 명주꾸리가 잡혀 있는 거야. 감았지. 그런데 신기하게 보름달이 감는 대로 가까이 나한테 다가오는 거야. 끝까지 감았지.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 보름달이 선명하게 내 배로 들어와 사라지고 그 달부터 태기기가 있더니 너를 낳았단다. 발복할 때까지 아무 소리 하지 말아야 한다기에 꾹 참았다가 너를 낳고 처음 말했더니 네 아버지가 두 말 없이 만산이라 지은 거야. 산에 금이 가득 차듯 우리 만산이 부자로 살라고.”

누구한테 들었을 설화를 어머니는 본인의 경험인 양 만산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가끔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이런 간절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만산의 집안 형편은 더욱 더 나빠졌다. 계속된 가뭄에 천수답은 말라갔고 아이들이 성장할수록 돈은 더욱 필요로 했다.

“금 만 산이라”

불어 첫 시간. 교수는 얼굴과 이름을 익힌다며 축농증 환자처럼 킁킁거리는 비음으로 한 사람씩 불러 세웠다. 만산의 차례가 되자 싱긋 웃더니 몸을 돌려 칠판에 ‘金滿山’ 이라 적었다. 보기 드문 달필로.

“나는 지금까지 삼십 년 동안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왔어요. 가르치며 항상 부르는 게 이름이라 관상과 성명학에 문외한이라 할 수는 없어요. 가르친 제자들의 졸업 후의 생활에도 관심이 많다 보니 저절로 관상과 성명이 품은 철학을 보는 안목이 생겼어요. 학생은 해양대학에 참 잘 들어왔어요. 내가 관상과 이름을 보니 김만산보다 김만선(金滿船)으로 바꾸는 것이 훨씬 어울릴 거요. 금만산(金滿山)은 허황하지만 금만선(金滿船)은 앞으로 학생이 본분이나 분수를 지켜가며 최선을 다한다면 현실로 전개될 운명의 가능성이 커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만산의 장래를 예언하고 교수는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자 명리학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명(命)이란 환경에 놓이게 되고 이 순간 운(運)이 정해진다. 모두 선천적으로 타고나므로 인간의 의지로는 개선의 여지가 별로 없지만 결코 한탄하거나 포기하지 마라.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다만 그 기회를 잡느냐 놓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뿐이다. 오늘처럼 만산(滿山)이 만선(滿船)으로 바뀌는 것도 운명이 변화될 수 있는 하나의 획기적인 기회다.”

결국 불어 첫 시간은 만산(滿山)이란 이름 때문에 철학인지 음양오행론인지 모를 명리학 강의로 끝나고 말았다.

그 후부터 만산은 자연스레 만선으로 불리게 되었고 교수의 자신만만함이 퍽 인상적이었던 그는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새로운 운명에 대한 호기심이 마음 한구석을 항상 맴돌았다. 그 때문인지 다른 과목은 D학점을 맴돌았지만 불어만은 항상 A학점이었다.

졸업 후 만선의 바다 생활은 많은 관심거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항해 보름만에 하루가 달라지는 시차를 겪는가 하면 열대와 한대를 넘나들었다. …………(하략)……………

 

□ 김상순, 신동아 논픽션 14회, 36회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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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수록 문예지 : <해양과 문학>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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