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보호(문성수)

등록일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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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보(Cape)호(號)

 

데크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새도록 강풍과 함께 물줄기를 쏟아 붓던 먹구름은 찢겨진 틈 사이로 파란 하늘을 언뜻언뜻 보이며 수평선으로 물러났다. 망망대해 한가운데로 배를 몰아넣고, 심해에 갇혀 있던 난폭성을 불러 일으켜 마음대로 흔들어 놓던 파도도 긴 꼬리를 감추며 좌현 쪽으로 밀려갔다. 그것들은 마치 성을 공격하다 여의치 않게 되자, 잠깐 숨을 고르며 진열을 가다듬기 위해 저만큼 나가앉은 모습처럼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선미 갑판에는 쌓아두었던 어구들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성난 파도가 마음대로 넘나들며 유린한 흔적이었다. 갑판에 나와 앉은 선원들은 밤새도록 계속된 공포의 시간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한 탓인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수평선만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 속엔 밤새도록 배를 물어 흔들던 파도가 아직도 두려움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지난밤의 폭풍우는 지독했다. 몸을 침상에 묶지 않으면 잠시라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배는 요동쳤다. 곧 전복될 것 같은 롤링을 계속하다 너울 끝에 얹히기라도 했는지 엔진의 공회전으로 몸을 부르르 떨다가는 밑으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지기를 계속했다. 현창에 와 부딪히는 둔탁한 충격과 소음이 선실 안을 죽음의 공포로 끌고 들어갔다. 같은 선실에 있던 햇도(갑고수)는 반쯤 얼이 나간 시선으로 흔들리는 천장만 바라보며 욕지거리 섞인 신음을 마구 뱉어 냈고, 갑판원 하나는 뱃멀미를 견디지 못해 이제 더 나올 것도 없을 것 같은 헛구역질을 하느라 눈이 허옇게 뒤집혀 있었다. 나는 현창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날 때마다 공포의 전율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뛰쳐나가 메인도어를 열고 달려드는 파도와 맞서고 싶은 죽음의 충동을 참느라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바다 밑바닥까지 끌어올려 사납게 요동치던 폭풍우도 새벽이 지나면서 차츰 그 기세가 꺾이더니 아침이 되자 조금씩 평온을 되찾았다. 바다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아침을 맞고 있었다. 상처를 입은 것은 카보호의 선원들과 그 위에 떠 있는 배 뿐이었다.

“보승! 풋데크 피해 상황을 빨리 파악해 보고하시오.”

나를 찾는 선장의 목소리에 놀라 브리지를 올려다보았다. 후방 견시창에 마도로스 모자를 눌러쓴 선장이 핸드마이크를 잡고 서있는 모습이 비쳤다. 갑판에 설치된 앰프도 지난밤의 횡포를 견뎌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넋을 잃고 주저앉아 있는 선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햇도에게 눈짓을 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떨어뜨려 발로 비벼 끄고는 선원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씨펄, 정신 차리고 일어나 일들 하란 말이야! 우리가 뭐 뽀트 타고 뱃놀이 나왔는지 알아! 니기미, 죽을 고비 넘겼으면 악착같이 잡아 올려 돈을 벌어야지. 응! 돈 벌려고 이 배 탄 거 아냐? 자 빨리빨리 어구 정리해, 움직이라구!” 그리고는 투승기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는 내 곁으로 걸어왔다. 그는 하루 밤 사이에 폭삭 늙어보였다. 해쓱해진 얼굴과 충혈이 된 두 눈에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그의 거친 입과 난폭한 성격은 같은 배를 탔던 10년 전과 별 달라진 모습이 아니었다.

“갑판장님. 선원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요. 사기가 영 밑바닥이라구요. 한 번 전재한 후 근 두 달을 적수(어장 이동)만 했지 잡어 이외 뭐 건져 올린 게 있냐구요. 좆 빠지게 투승했지만 맹탕 물빵이었잖수. 그런데 저 선장이란 작자는 우리에게 돼도 않은 명령만 내려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내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그는 사납게 뜬 시선을 마지못해 거둬들이며 갑판 바닥에 ‘찍’하며 침을 뱉었다. 그의 의식 속엔 10년 전 나에게 제압당했던 치욕스런 기억이 아직도 남아 그를 움츠리게 한 모양이었다. 걸핏하면 선원들에게 육지에서의 과거 전력을 내세우며 폭행과 폭언을 일삼던 그가 갑판장인 나에게까지 행패를 부리며 대들었을 때, 참다못한 나는 그를 불러 선방으로 때려눕힌 후 로프 자르는 칼로 그의 팔등을 그어버린 일이 있었다. 원양에 나와 갑판을 지휘하려면 놈보다 더 잔인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햇도는 공공연히 나의 멱을 따겠다며 떠들고 다녔으나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를 또 이번 항차에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하략)………………

 

□ 문성수, 1989년 부산MBC 신인문예상 소설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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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수록 문예지 : <해양과 문학>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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