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자와의 긴 항해 2, '제6회 해양작품 감상 우수원고 모집' 대상 작품

등록일2023-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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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자와의 긴 항해 2

심호섭ㅣ시인

 

 

큰 새가 날아왔다.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와서는 몇 번 퍼덕이다가

항해실 창가 핸드 레일 위에 앉았다.

정오의 햇빛에 새의 흰 몸통이 눈부시다.

새는 고개를 수그리더니 부리로 이리저리 쪼아 댄다.

자세히 보니 가슴 부위에 피 같은 것이 나 있다.

상처를 입었나 보다.

새는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에 깃털이 나부끼고 있었다.

 

북위 07°, 서경 123°, 그리고 수심을 나타내는 숫자와 알파벳 기호들.

나는 이런 것들로 채워진 해도 위에

4B 연필로 침로선을 긋고 있었다.

나는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이 기록된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검은 잉크펜으로 항해일지에

오늘의 일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항해실 바깥의 큰 새가 궁금해졌다. 나는 하는 일을

멈추었다. 그리고 큰 새에게 가 보았다.

새는 잔뜩 웅크린 채 앞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큰 새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새는 크게 날개짓하며 하늘로 치솟았다가

다시 갑판에 내려앉았다.

다시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새가 나를 쳐다본다.

새의 얼굴이 사납다. 무섭다.

저 새는 이빨이 있을지도 모른다. 손갈퀴도 사나울 것이다.

 

그 자가 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자는 새에게 손을 내밀었다.

새가 그 자에게 손을 주었다.

그 자는 호주머니에서 먹이를 한 줌 꺼내어 새에게 주었다.

무슨 열매 같은 것이었다.

새가 먹이를 열심히 먹는다.

새가 힘을 얻었다.

새의 가슴 부위 상처가 나아졌다.

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항해실 위의 하늘을 빙빙 돈다.

나는 새와 새를 바라보는 그 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참 보기가 좋았다.

 

그러나, 새는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싸우러, 싸우러 가는 거요.

싸우다 상처를 입으면 또 이렇게 찾아올 거요.

 

갑판으로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새가 없다.

나는 새를 찾기 위하여 배의 가장 높은 곳인

나침의羅針儀 갑판으로 올라갔다.

사방으로 멀리, 하늘을 살펴본다.

보인다. 새가 보인다.

그 큰 새가 날아가고 있다.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

 
자료출처 : 시집 '해류와 노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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