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귀 때문에

등록일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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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귀 때문에

이석재 ㅣ 시인

 

 

2월의 달력 낱장을 뜯어내면서

3월 달력 속 봄꽃 만발한 사진이 건네 오는

햇살이 목련꽃 부푼 봉오리 어루만지는 소리

듣고 말았네

소름 쫘악 끼치는 손길이 슬금슬금 스며들어

솜털 보송보송한 우윳빛 속살 더듬는 오전 열 시

그 찬란한 유희 앞에서

그저 노곤한 몸 내맡기며 가쁜 숨 다독였네

 

북위 2도 40분의 적도 위에서

투명한 빗방울이 동백나무 잎맥을 따라

또르르르 혓바닥을 굴리는

오후 네 시쯤의 스침 앞에서

찌릿찌릿 건너오는 기억들 치맛자락 끄는 소리

듣고 말았네

울컥하니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얼굴 하나

느닷없이 마주치고 말았네

 

오후 일곱시에도 섭씨 32도인 적도의 바다 위에서

파란 양철 대문 앞을 서성이는 바람이 나즉히 부르는 이름 하나

가느다란 그러나 푸른 수액 차오르는

안개 자욱한 저녁의 담쟁이 넝쿨 기어가는 소리

다시 듣고 말았네

 

사람의 목소리 앞에서는 움찔움찔 글썽글썽 웅크리는

말에 어둡고 소문에 얇은 내 귀는

뜨거운 바다 위에서

자정이 되어도 잠들지 못하는

참 못생긴 멍텅구리를 닮은 내 귀는.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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