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일기

등록일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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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일기

이석재ㅣ시인

 

 

1. 고기떼를 보다

 

새벽 네 시쯤의 어둠은 자정의 어둠보다 더 깊다

불빛 한 점 없는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가는 길

불현듯 현재 위치를 확인한다

북위 03도 29분, 동경108도 46분

싱가포르 항구에서 마주로 섬을 향해 가는 길

 

아침은

하얀 머플러처럼 눈부신 잔물결을 일으키며 스쳐가는

고기떼를 닮았다

적도 부근의 바다는

비단 폭을 펼쳐 놓은 듯 부드럽게 꼼지락거리며

연분홍빛 얼굴로 부끄럼을 타고 있다

 

누군들 삶의 길에 변곡점이 없으랴

내 삶의 침로에도 변침점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시간의 바다 위를 미끄러져 건너오며

멈칫거렸던 한 때를 지나 물 위를 걷는 지금

내일은 어떤 모습으로 또 다른 변침점을 더듬고 있을까.

 

2. 동경 133도를 지나며

 

숨이 턱 막힐 듯 붉은 사막 같은 노을을 등 뒤에 두고

마주로 섬을 향해 동쪽으로 가는 길

침로는 090도 북위 5도 10분 동경 133도를 조금 전에 지났다

바람은 북동풍 해류는 남쪽으로 조금씩 배를 옮기고 있다

레이더에 나타나는 배는 12마일 거리에서 340도 침로로 가고 있다

어쩌면 저 배는 한국으로 가는 배인지도 모른다

시나브로 저물어가는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지금은 오후 5시 50분

그리운 얼굴들이 수평선을 첨벙첨벙 뛰어와 가슴에 물보라를 일으킨다

노을이 저리 붉어서

오늘의 그리움도 덩달아 타오르는 걸까?

언제였던가, 나는

그리운 것들은 왜 다들 멀리 있는가? 하고 혼잣말을 했던 적이 있다

지금 다시 그 때의 혼잣말을 되뇌인다

그리운 얼굴들은 왜이리 다들 멀리 있는가? 하고

 

3. 야간 항해

 

강낭콩보다 더 붉은 여자가 살았던 도시를 떠날 때

조금씩 가로등의 어깨가 굽는 것을 보았었다

눈이 침침한 할머니의 등이

바늘귀에 실을 꿸 때마다 낙타를 닮아가는 것처럼

가로수들이 검은 빛깔의 그림자를 줄무늬로 드리울 즈음

지독한 투통과 싸우며

흐릿해지는 의식만큼 아득하게 멀어지는 빗소리를 들었었다

조금씩 흐릿해지는 기억의 저편에는

여전히 서 있는 한 사람의 등 뒤로 자욱했었던 비안개가 머물러 있었고

 

긴 꼬리를 매달고 수평선으로 투신하는 별똥별의 행렬이

조타실 유리창 밖으로 분명히 보인다

하역을 하며

무거웠던 마음의 짐도 슬쩍 끼워 내려놓고 가는 항로에는

하늘도 무거웠던 별똥별들을 슬쩍슬쩍 내려놓고 있나보다

오늘의 망각으로 달려가는 몸짓은

시지프스의 몸짓과 얼만큼 닮아있는 것일까

고집 센 빗발들 흐드러지는 새벽 두 시의 바다 위엔

잠든 할머니처럼

사람도

하늘도

넉넉히 말이 없고.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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