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끝, 수평선 끝으로의 일탈(나의 바다와 문학9)

등록일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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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끝, 수평선 끝으로의 일탈(나의 바다와 문학9)

 

내 고향은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주문리, 태백산맥이 동해로 흘러내린 기슭의 조그마한 포구이다. 그곳에서 승선을 위하여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바다와 함께 자라왔다. 음유(吟遊)가 자라던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오리나루라는 갯바위로 둘러쌓인 조그만 선창가 주변에서 개헤엄을 배웠던 기억과 그 주변의 작은 바위섬으로 수렵을(홍합이나 고동을 잡았던 것 같다) 다녔던 일상, 조금 성장한 뒤로는 주문진 읍내와 십 여리 떨어진, 그 땐 소돌이라 부르던 지금의 주문진해수욕장에서 째복이란 조개를 잡고, 사구 가득 부스럭 거리는 바람과 흐드러진 해당화의 열매를 따먹으며 명사모래를 밟을 때 나던 소리가 세월지난 지금도 가끔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으니 해양에 대한 문학적인 토양이 그 때부터 내 몸속에 침전되고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어촌의 삶이 모두 그러하듯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빠듯한 생활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기 위한 타지로(유일하게 주문진읍에는 주문진수산고등학교 밖에 없었다) 나가는 것은 가정 형편상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입학할 때가 1975년도였는데 우리나라의 원양어업이 시험조업을 끝내고 개화의 꽃을 피우던, 어촌의 구석에도 원양어선을 승선하기만 하면 특례보충역이란 제도로 군 입대도 면제되고 집도 사고 밭도 산다는 풍문이 흘러들러올 정도였다. 어떤 삶의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엘도라도였기에 수산고등학교 특히 선장이 될 수 있는 어업학과는 경쟁이 심해서 오히려 타지에서 유학을 올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뱃사람을 양성하는 수산고교는, 특히 선장을 만드는 어업학과는 애당초 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일 같이 방과 후 집합 그리고 뱃놈 기질을 만든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폭력, 사유의 깊이 보다는 점점 물비린내 흥건한 예비뱃놈으로 변해갔다. 글이라고는 이성에 눈을 뜨는 몽상과 가끔씩 친구의 연애편지를 대필하여 주는 것이 전부였다. 바다로 나아갈 날만 기다리는 그것은 생사의 문제였다.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했고 그 나마 하루 벌어 하루 먹던 일도 행복인 듯 점심을 굶게 되고 때때로 저녁마저 물배로 채우는 날이 많아져 갔다. 주문진 방파제로 나아가는 날이 많아지며 방파제의 테트라포트에 부딪쳐 부서지는 물거품에 욕망과 욕구를 녹이며 바라보던 아득한 바다의 끝, 수평선의 끝까지 떠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때 바다는 그 가난을 돌파할 수 있는 모세의 지팡이였고 신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무이한 비상구였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였다. 그 땐 그랬다.

 

바다는 가난을 벗고 신세계로 나아가는 비상구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19살, 주문진 수산고등학교를 졸업도 못한 그 해 10월 원양현장실습이라며 라틴아메리카의 수리남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살아서 귀국 할 수 있을까 라며 멀어져 가는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원양어선의 승선은 좋게 말하면 조리장(일반적으로 통칭하던 하장)으로 시작했다. 경제개발로 달러가 필요했던 정부(한국수산개발공사)가 미국의 마이애미에서 건조한 새우트롤 어선은 크기가 150톤 정도로 부산에서 조업하고 있는 오징어트롤선 만한데 그 때 벌써 자동화가 되어 승선 인원이 선장을 포함한 4명 내지 5명에 불과했다. 아무리 해기사면허장을 취득했더라도 승선경력이 전무하고 나이도 어린 실습생들은 밥쟁이(하장) 노릇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이 때 담배를 배우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척박한 환경이라 치솟는 분노와 감정을 추스르는 어떤 열기들을 다스려야 했다. 선장이 되어서 선원들을 통솔하는 입장이 된 지금 그 때의 생활들이 선원들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그렇게 나의 바다 인생은 시작이 되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 한국원양어선이 나가있는 세계의 모든 바다와 항구를 섭렵하게 되었다.

요즈음 상선은 한번 승선하면 10개월 정도 근무하고 유급 휴가를 받는데, 당시는 한번 계약하고 출국하면 2년에서 3년 정도가 걸렸다. 어기를 마치고 무라사끼 오징어채낚기 시험조사선에 승선하여 북태평양에 출어를 하였는데 정수리를 타고 흐르던 진한 농무에 기겁을 하던 바다를 지금은 10년이 넘게 해마다 출항하고 있으니 사람의 인생은 알 길이 없다. 다음 승선은 이란어장의 트로올선이였다. 그곳에는 북한의 트롤선도 진출해 있었는데 같은 부두를 사용하고 있어서 입항시기가 같을 때에는 앞뒤로 나란히 계류하였다. 후줄근한 그네들의 모습과 한국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외출할 때에도 4명 6명씩 짝수로 오와 열을 맞추어서 다니는 모습을 보고 공산주의의 폐단과 자유의 소중함을 느꼈다. 승선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란은 그 당시 팔레비의 정권이 무너지고 호메니의 이슬람신권이 복귀하면서 정국이 어수선 했다. 곧이어 이라크와의 전쟁이 일어나고 매일 밤 이라크의 공습을 피한다고 등화관제를 하며 대공포를 쏘아 올리는 풍경을 보며 전쟁이란 것의 간접체험도 했다.

이번엔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그랜드뱅크로 갔다. 기지는 뉴펀들랜의 세인트 피엘이란 상주인구가 2000명 정도인 프랑스계의 주민들로 사용어도 불어가 공용어이며 포경시절 프랑스의 전진기지였던 조그마한 섬으로 1년에 태양을 20일도 볼 수 없는, 태양이 사라진, 얼어버리는 항구의 똑 같은 하루가 되풀이되었다. 항구를 출항할 때 얼음 부서지던 소리가 마치 󰡒아침마다 돌 깨는 소리에 가슴에 금이간 비둘기가 삶의 터전을 잃은󰡓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의 싯귀처럼 들렸다. 축축한 라데팡스의 불빛 같던 죽음의 검은 작두 위에서 핏빛 춤을 추던 20대의 말, 승선했던 회사에서 아내를 만나 사랑을 시작했다. 멕시코만류에서 만들어진 허리케인이 미국동부를 강타하며 지나가는, 몇 년 전 출시 된 <퍼펙트 스톰>이란 영화의 무대이기도 한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스커딩(Scudding)으로 사흘 밤낮을 피항하다 다리를 펴고 거울을 보니 출항한 항구가 보였다. 죽음과 삶이 철판 한 장 차이인 바다에서 무서움을 거부하며 쿨하게 살고 싶다 외치던 나도 삶에 대한 두려움이 소금의 결정처럼 몸속의 결석으로 박혀갔다.

 

캐나다에서 귀국하자마자 다시 뉴질랜드의 겨울바람과 맞서고 있었다. 트롤선 경력이 쌓였으나 고졸이라고 1항사 진급이 안 되는 구조적 모순에 점차 승선생활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지쳐갔다. 때마침 회사에서 어장을 이란을 거쳐 포클랜드로 옮기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뉴지에서 출발하여 호주의 남단을 돌아 인도양을 종단하는 고달픈 항해를 하며 내 승선 경력중 안타깝게도 슬픈 기억인 계약을 종료하지 못하는 중간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배가 주부식 보급차 항구에 입항하자 어두운 복도에 눈부신 빛이 쏟아지듯이 난 미련 없이 귀국 행 비행기를 탔다. 그 이 후 포클랜드로 이동하던 배가 케이프타운 입항하여 쇼핑차 상륙한 선장님이 강도들의 피격에 숨지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악 물린 신음이 저절로 터졌고, 이 시간이 나의 전 생애에서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시간인 것 같다. 나는 다음해에 결혼을 하였다.

신혼에 단 꿈은 길지 않았다. 결혼하고 10일 만에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그동안 이력을 쌓아왔던 트롤선에서 업종을 바꾸어 북양오징어자망선에 1등 항해사로 출항을 한 이 때가 88년도였다. 온 통 먹물로 뒤범벅이 된 조타실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내가 모드를 변경한 작업의 강한 강도로 하루를 보내며 󰡐여기저기서 실종이다󰡑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면 왠지 기분이 이상하던 죽음들이 유자망의 코마다 걸리던 그 바다에서, 내 생애 두 번째 죽음과 직결된 바다를 만났다.

남태평양에서 발생한 열대성 저기압이였는데, 이 긴장감을 촉발시키는 바람이 속력을 갑자기 올리며 어장을 후려쳤다. 바람이 몰려오고 파도도 따라왔다. 파도의 절정을 넘어가는데 왜 그리 시간이 더디든지 파도의 골을 내려가는데 왜 그리 끝도 없이 쑤셔 박히던지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선체 점검시 외부구조물들이 평생 어깨에 붙어 다니던 귀신과 눈이 마주친 것처럼 파도에 모두 다 사라져버려 섬뜩했다. 유언조차 없이 사라진 몇 척 배들의 조난무전에 󰡐난 살아있구나󰡑안도의 숨을 내쉬던 기억이 이 순간에도 몸을 떨게 한다. 아아 잠결에도 튀어 오르는 그 질풍 불던 날의 아비규환이여!

그후 남태평양의 참치 선망선으로 송출을 나갔지만 회사의 부도로 1년만에 귀국했다. 때 마침 원양봉수망이 늘어나면서 항해사들이 많이 필요했다. 나는 서슴없이 승선을 하였다. 그곳에서 그토록 원하던 선장의 꿈도 이루었다. 허나 그 과정 역시 만만치 않았다. 미래를 기약하지 못하고 살을 맞대고 사는 바다에서 선장이 된지 1년. 승선한 선박이 매도되어서 페루오징어채낚기로 바뀌는 바람에 북태평양을 횡단하여 페루의 카야호 항까지 대권으로 항해하는, 다시 입어권이 나오지 않아 한 달만에 부산으로 회항하는 곡절. 그 긴 여정에서 귀신고래의 무리를 보기도 했다. 다시 원양봉수망 어장으로서 출항했다. 그러하다가 선장 2년차였을 때 또 고난이 찾아왔다. 봉수망 작업장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어느 날 기관실에 물이 들어온다고 당직기관사가 긴박히 보고를 해왔다. 기관실은 벌써 주기관의 절반까지 물이 차올라 절망적이었다. 주변의 선박들에게 구조요청을 하였고 끝내 전선원의 퇴선을 명령하게 되었다. 뱃사람들 중에 한 평생 승선을 하면서 퇴선을 명하는 선장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안의 착찹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는 나에게 해양문학이 존재한다면 이렇게 극한의 순간들을 넘기면서 사리처럼 박힌 음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文人으로 새출발… 뱃사람의 애환과 희망 쓰고파

 

앙금처럼 가라앉은 지난 시간의 항적 위에 또 다시 승선 생활이 이어졌다. 1년을 2어기로 나누어 반은 꽁치어장에서 반은 남서대서양에서의 오징어채낚기를 하는 선박에서였다. 북태평양에서의 꽁치어기를 마치고 남태평양항로를 거처 뉴질랜드에서 칠레 끝까지 툭툭 나타나는 유빙의 출몰을 경계하며 드레이크수로를 통과하여 포클랜드어장으로 가는 남빙양 항로, 또는 말라카수로를 통과해서 인도양을 지나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을 횡단하여 포크랜드어장으로 가는 항로로 그 때 그때 그해의 기상이나 출발 시기에 맞게 항로를 선택하여 포클랜드어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입어 라이센스를 받기 위해 입항해야하는 포클랜드의 수도 스텐리항구…. 그리고 북태평양으로의 회항, 태평양과 인도양을 종횡으로 가로 지르며 대서양을 남빙양을 횡단하며 태풍과, 사이클론, 허리케인과 조우하고 브리자드의 폭풍설을 맞으며 귀신고래를 보며 이곳저곳 외국의 항구를 기웃거리며 그곳의 풍물들을 구경하며 술을 마시며 갈색머리아가씨와 설익은 마도로스의 사랑도 하며…. 내 안의 묵은 마음들, 그런 마음들이 쌓여 나의 문학적 토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 실습항해사에서 3등, 2등, 1등 항해사를 거쳐 선장이 되어서 지금까지 3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난 삼각파도를 뚫는 괭이갈매기처럼 씩씩하게 한 끼의 밥값을 위하여 이 바다 저 바다를 해파리처럼 부유하며 외로움과 고독을 삭혀왔다. 소금물에 절인 마음도 있을 것이며 달빛에 부서진 마음들, 태양 볕에 달구어진 마음들, 태풍 속에서 오금저린 상흔도 있을 것이다.

이제 문학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같다. 그리고 많은 뱃사람들이 어부들이, 내 몸처럼 떠다닌다. 황금빛 찬란한 유산이 없어 흔들리는, 비늘이 생기고 비린내를 풍기며 바다가 되었고, 바다의 속살을 헤집는 물고기가 되었다. 물고기가 보는 세상, 바다에서 육지를 보는 눈으로 뱃사람들의 시를 쓰고 싶다. 뱃사람들의 고뇌와 고독과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 문학은 삶에 대한 나의 애착인 것같다. 아니 지나온 체험의 삶을 그대로 고백하라는 강요인지도 모르겠다. 시는 진리이며 단순성이란 것을 믿으며 오늘도 파도는 연민에 눈빛으로 나를 토닥거리고 바다에는 내 문학이 무럭무럭 자란다.

 

이윤길, 시인

 

□ 자료출처 : 海바라기 2008년 4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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