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곤의 바다, 도전, 민족성

등록일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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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곤의 바다, 도전, 민족성

- 홍성곤의 ‘한국인 최초의 남극탐험’을 읽고

김아린

 

 

나는 도전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전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류 문명이라 누리는 많은 것들이 누군가의 도전을 통해 혁신된 발명품이다. 그러한 발명품 위에서 생활을 영위하기 때문인지 나는 이상하게 도전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마음과 함께 존경심을 느낀다. 특히나 한 치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영역을 개척하는 도전자를 볼 때 그러한 마음이 더욱 진하게 풍기는 것 같다.

해가 지고 밤이 오는 시간대의 하늘을 보면, 밤의 짙은 푸른색과 낮의 짙은 붉은 색이 오묘하게 교차할 때가 있다. 이때를 황혼이라고 하는데 이때 저 너머로 오는 실루엣이 자신이 키우는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이 안 되기 때문에 이 시간을‘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부른다. ‘개와 늑대의 시간’ 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개인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늑대인지 분간이 안 되는 상황을 지칭할 때 쓰인다. 나는 평범한 도전자와 위대한 도전자를 가르는 것이 바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생각한다. 인류가 아무도 그곳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모를 때 자신 있게 다르게 표현하면 무모하게 도전하는 사람. 왜냐하면 대부분의 위대한 발견과 발전은 아무런 정보 없이 대범하게 탐구하던 이들로부터 탄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인 최초의 남극탐험>의 초반에 소개되는 탐험가의 이야기는 오묘한 마음이 들게 했다. 남극에 대한 많은 정보없이 탐구를 떠났던 아문젠은 남극점에 다다라서 동사했고, 그 뒤를 따라 탐험했던 스코트 역시 장렬히 동사한다. 그가 동사한 지점으로부터 20km 거리에 식량 저장소가 있었다는 사실은 위대한 도전의 무거운 대가를 여실히 느끼게 만든다. 당시 제대로 된 정보가 없음에도 탐험을 떠났던 이들의 위대함에 감사한다. 아무런 대가없이 위대한 모험을 했던 아문젠과 스코트는 비록 동사하였지만 그들이 떠남으로써 남극에 대한 인류의 도전이 더욱 가세된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남극을 탐험할 때 그들의 죽음은 이미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음은, 그들의 죽음이후 남극연구를 위한 도전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인 최초의 남극탐험>의 저자는 재일교포 2세인 홍성곤이다. 처음 이 글을 읽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이 글은 소설인가? 수기인가? 하는 것이었다. 글 전체적 내용을 보면 상당히 당대의 상황과 장면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수기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또 다르게 보면 글의 문장이 굉장히 문예적이고 수사학적이라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인지 수기인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하나의 우수한 해양문학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글을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글이 단순히 남극에 치중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대의 일본의 억압적 분위기, 일제강점기, 현실주의 세계관 등의 잔인함이 자주 표현된다. 나라를 빼앗겨 당당히 한국인이라 말하지 못하던,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민족성의 자긍심을 다시 가슴 깊이 묻어두어야 했던 재일교포의 서러움. 그런 점들이 나에게 단순히 남극일지라는 느낌을 탈피시켰던 것 같다. 점점 사라져 가는 당대의 잔혹함에 대한 분노를 글을 통해 다시금 상기시켜 국가와 민족성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하게 만든다.

특히나 극 초반 배에서 옛 일본 순사가 조선인들을 고문했던 일을 무용담 풀 듯 말하는 장면은 분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자신이 한국인임을 아는 일본인 동료들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순사의 말을 듣고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분노를 증폭시킨다. 그럼에도 나는 분노보다는 슬픔을 더욱 느꼈다. 나 또한 한국인이기 때문이며, “그 입 닫아라!” 소리칠 수 없는 억압적 상황의 잔인함 때문이다. 묵묵히 듣고 가슴 깊이 우러러 나오는 분노를 다시금 삭일 수밖에 없는 당대 최빈국의 서러움.

이 소설의 주제가 ‘남극’이 아니라, ‘민족과 한국’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마지막 장면이다. 극의 후반 남극에 다다라서 대뜸 시드니에 정박하여 유도시합을 한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것과 유도시합에서 신명 나게 시합을 벌인 뒤 일본인의 자긍심을 말하는 이를 뒤쳐놓고 편하게 잠들었다고 마무리하는 것이다. 아마 저자 홍성곤은 자기 내면에서도 차갑게 식어가는 민족성의 불꽃을 유도시합을 통해 되찾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유도시합을 통해 멋지게 한판승을 내면, 자신의 마음속에서 억압적인 분위기로 인해 차갑게 식어가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다시금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그것이 비록 일본문화의 상징인 유도였을 지라도 말이다. 유도시합에서 승리한 후, 일본인의 민족성을 들먹이는 이를 두고도 홍성곤이 태연해질 수 있었던 것은 유도시합을 통해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홍성곤의 글을 보며 개인적으로 오묘한 기분을 느낀 부분은 한국인 최초의 남극탐험이 일본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일 것이다. 그때 한국은 뭐했냐 하면서 불평할 수 없음은 한국에 살아가는 입장에서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홍성곤이 배에서 당당하게 한국인이라 외칠 수 없는 강압적인 상황에서 최초의 남극방문이 이뤄졌다는 점은 마음 한쪽을 불편하게 했다. 세계 현실주의의 입장론의 잔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며 강압적으로 세뇌시키는 듯한 억압적 분위기에서,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민족성을 지키며 한국의 자긍심을 드높여줬다는 감사함도 들었다. 작품을 읽는 내내 내심 불편했던 이러한 점을 홍성곤 스스로가 한국인이 되어 유도시합에서 아득바득 이겨 일본인의 칭찬을 듣는 장면에서 우리는 모두 그것이 한국인을 위한 위로이며, 위안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글을 다 읽고 홈페이지의 다른 글들을 읽어보던 중, 한국해양문학관 CYBER 홈페이지<해양문학이란?>의 설명란의 한 문장에 눈길이 갔다.

“역사적으로 한 민족의 해양문학은 해양활동과 궤를 함께 해 왔다.”

단순히 해양문학과 해양활동의 연결성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생각했다. 문학이 인간과 사회에 가지는 영향력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세계를 제패했다고 말하는 영국은 바다로의 모험을 떠나는 것의 주저함이 없었고, 그에 따라 많은 바다를 겪으며 다양한 경험과 상황을 문학이라는 언어로 풀어냈다. 또한 그 문학을 읽고 드넓은 바다로의 로망을 가지고, 바다를 향해 모험을 떠나는 일종의 선순환이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해양문학의 가치는 단순히 읽는 즉시의 쾌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을 바다로 이끌고 망각해가는 인간의 도전성을 자극하는 것이 해양문학의 위대한 가치이다. 우리는 해양문학을 읽고 지구 대부분의 영역인 바다로 나아간다. 바다로의 탐험은 지구를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일 것이며, 인간의 또 하나의 위대한 진화일 것이다.

그러면 홍성곤의 소설은 어떨까. 영국의 해양문학이 문학이라는 언어로 바다로 이끌어 세계제패를 이뤄냈다면, 홍성곤의 <한국인 최초의 남극탐험>은 우리 스스로가 현대 시대의 세계화로 인해 잊어가던 한국 민족성의 불꽃을 다시금 불타오르게 만든다. 또한 한국인이 일본에 무시당하던 시절에 자신이 당당히 한국인으로 남극을 탐험했던 것처럼, 우리도 당당하고 끊임없이 세계라는 바다로 탐험하라고 말한다. 세계라는 바다를 탐험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세계의 수많은 개와 늑대의 시간을 탐험하는 것. 또한 홍성곤을 비롯한 수많은 탐험가가 우리에게 늑대가 아니라 개임을 밝힌 개척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글을 다 읽고, 마음속의 깊은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마치 홍성곤이 나에게 소리치는 듯 했다. 지금 당장 세계라는 바다에 뛰어들라고. 끊임없이 도전하라고.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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