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사람들의 생명 존중

등록일20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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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사람들의 생명 존중

이용득

 

 

생명 존중의 의견비

 

오늘날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다. 이미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국내 인구는 1,500만 명을 돌파하였다고 하니, 이대로라면 인구는 격감하는데 늘어나는 것은 반려동물이 아닌지 모르겠다. 마치 결손 가족을 반려동물로서 메꾸고 있는 현상 같아 보인다. 이러한 반려동물 가운데서도 사람과 가장 친근하면서도 사랑을 받는 동물은 아무래도 반려견일 테다.

신라 때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장에 다녀오다 술에 취해 그만 길가에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산불이 났고, 곁에서 주인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것을 발견한 개는 웅덩이로 달려가 온몸에 물을 묻혀 와서 주변을 적시기에 바빴다. 이로 인해 주인을 살아났지만, 결국 개는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이 사실은 뒤에 알게 된 주인은 몹시 슬퍼하며 죽은 개를 땅에 묻고, 갖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다.

여기서 싹이 돋아 큰 느티나무가 되었고, 이 나무를 개 獒(오)자에 나무 樹(수)자를 합쳐 ‘오수’라는 지명을 남겼다. 전라북도 임실에서 전해오는 오수 의견 이야기다. 훗날 감명을 받은 지역주민들은 의견의 넋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오래 기리고자 의견비를 세웠다. 그리고 지난 1982년부터 이 스토리를 입혀 지역 문화축제 행사로 이끌어 오고 있다. 이 설화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고, 최자의 󰡔보한집󰡕에도 나온다.

문제는 이러한 의견(충견)의 이야기가 이곳뿐만 아니라 동서양 곳곳에서 들려오곤 했지만, 이들 동물에 대한 예우는 매몰찼다. 생활 속 깊이 자리한 보신 문화가 한동안 견공들을 수난의 세계 속에 살도록 했으니 말이다. 그나마 오수 의견비라도 세워져 있으니, 조금 위안이 될지 모르겠다.

의견(충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혹시 바다에서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없을까? 많지는 않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는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더러 있다.

 

고래를 먹지 않습니다

 

먼저 서해안 흑산도로 가보자. 그곳에는 고래에 얽힌 설화 한 토막이 전한다.

흑산도 모래미 마을에 함양 박씨 성을 가진 한 노인이 살았다. 어느 날 고기잡이를 나간 할아버지는 폭풍을 만나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마침 그때, 고래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 노인이 탄 배를 자신의 등에 업었다. 노인은 “고래가 배를 뒤집으면 이제 죽었다”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고래는 노인이 탄 배를 흑산도 앞바다에 부려 놓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노인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노를 열심히 저었다. 하지만 갑자기 강한 풍랑이 일어 점점 배는 섬에서 멀어져 갔다. “이제는 죽는구나”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무렵, 다시 고래가 나타나 노인이 탄 배를 모래미 마을까지 밀어주었다. 덕분에 노인은 무사히 살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부터 모래미 마을의 함양 박씨 사람들은 조상의 목숨을 구해준 고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고래 고기를 일절 먹지 않는다고 했다.

되돌아보면, 흑산도는 고래의 고향으로 유명했다.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은 고래 하면 장생포를 떠올린다. 정약용이 흑산도에 유배 와서 이곳에서 쓴 󰡔자산어보󰡕에는 고래가 비늘 없는 물고기로 등장시켜 소개한다. 이 해역에 큰 고래들이 많았던 것은 바다가 따뜻하고 먹잇감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오랫동안 흑산도는 파시 어항으로 유명했다. 1월~4월은 조기 파시, 2월~5월은 고래 파시, 6월~10월은 고등어 파시가 그것이다. 먹이 쇠사슬 관계로 고래가 자주 이곳 바다에 출몰했던 것 같다.

한반도 바다에서 고래잡이가 본격화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19세기 후반 석유가 대량 생산되기 전까지만 해도 고래는 바다에 떠다니는 자원의 보고였다.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등유는 물론 윤활유, 화장품과 의약품 원료 등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포경어업의 최강국은 미국이었다.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 제독도 자국의 포경선을 쫓아 동아시아 지역까지 왔었고, 이 지역에서의 포경어업 전진기지와 중국과의 교역을 위한 교두보가 절실했다. 이게 일본을 무력으로 개항시킨 계기가 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이러한 자원경쟁에 뛰어들면서 야욕을 불태웠고, 얼마 후 한반도 근해에서 고래잡이 독점권을 장악했다. 1903년부터 해방하기 전까지 40여 년에 걸쳐 한반도 근해에서 일본이 잡아들인 고래는 무려 1만 마리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한다. 그 중심에 흑산도가 있었다. 특히, 대형 고래들의 산란장이 흑산도 해역이었기에 한반도에서 고래의 고향은 흑산도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있었던 관계로 현재 흑산도에는 고래 공원이 있고, 그곳에는 고래 상까지 세워져 있다. 또한, 흑산도의 ‘자산문화관’에는 고래 턱뼈의 일부가 전시되고 있다.

이처럼 흑산도 주민에게 있어서 고래는 생활 깊숙이 파고든 존재였다. 더구나 바다는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기에 주민들은 안전과 만선을 신에게 빌어야 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믿는 전통 신은 32개인데, 그 가운데 이승의 것으로 고래가 들어 있다. 베트남 남부 껀저 지역에서는 매년 음력 8월 중순에 지역 어민들의 전통축제인 응인옹 축제(Can Gio's Nghinh Ong Festival)를 개최한다. 응인옹은 ‘고래신 영접’이란 뜻이다. 이곳 어민들은 고래를 용왕처럼 숭배하며, 수호신으로 모신다고 한다. ‘남해 장군’이라 부르며, 폭풍우로부터의 안전과 풍어, 어촌지역의 무운을 빈다고 한다.  

이처럼 흑산도 주민에게도 고래는 도움을 주는 바다의 용왕과 같은 신적인 존재로서 이와 같은 설화가 만들어져 전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복어를 먹지 않습니다

 

흑산도 고래설화보다 더 진솔하고 은혜로운 이야기는 연주 현씨 집안의 족보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 후손들은 대대로 전해오는 선조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선조 할아버님께서 풍랑을 만나 돌아가셨는데, 후손이 먹던 복어 뱃속에서 그 할아버지의 도장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 뒤로 후손들이 복어 생선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 족보에 전하는 내용은 이러하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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