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해양문학인가

등록일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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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해양문학인가

김부상 I 소설가

 

 

나의 본적은 경남 거제군 일운면 구조라리 398번지다. 6・25 동란으로 거제도 고현면에 생긴 포로수용소는 구조라 해수욕장의 모래를 떠날라 지었다고 들었다. 금빛 모래가 수북한 남쪽 바다는, 진시황이 불로초를 캐러 다녀갔다는 해금강이 거뭇하게 보이는, 구로시오 난류가 북상하며 데려온 멸치 떼가 붐비는 뒷개였다. 임진왜란 떄 수군이 진주했다는, 바다를 향해 뱀 머리같이 돌출한 산성을 경계로 잘록한 뱀 모가지 땅 너머 동쪽은 여행객이나 물류선이 드나들던 앞개였다.

사라호 태풍 때 뒷개에서 솟구쳐 오른 바닷물이 앞개로 넘어갈 때 어린 나는 어른의 등에 업혀 산성으로 피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윤슬이 반짝이는 잔잔한 바다는 언제나 평화롭고 안온한 어머니의 자궁이었다. 그러나 태풍을 만나 닥치는 대로 제 힘껏 깨부수고 무너뜨리는 바다는 광포한 무법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대다수 섬 사람들의 심성에 온유함과 강퍅함이 동거함은 저 바다를 닮은 탓이라고 나는 믿고 자랐다.

 

내 나이 오십이 넘은, 2007년 1월이었다. 부산일보 신춘문예에서 나는 ‘명태를 찾아서’란 중편소설로 해양문학상 부문에 당선되는 뜻밖의 행운을 누렸다. 이 상은 당시 해양대학교 교수이자 한국해양문학가협회 회장이셨던 황을문(黃乙文) 선생님이 해양문학의 창달이란 고창(高敞)한 기치를 내걸고 해양대학의 후원과 부산일보의 협조를 구해 마련한 귀한 상이었다. 나는 제1회 수상자의 자격으로 자연스럽게 한국해양문학가협회(이하 ‘해문회’로 칭함)의 회원이 되었고, 동시에 황을문 선생님과 맺은 소중한 인연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우리의 인생은 우연과 필연의 수레바퀴다. 내가 글을 쓰며 문학을 동경한 것은 청소년 시절, 마치 열병을 앓듯, 어느 소녀를 짝사랑하게 된 일에서 비롯된 우연이었고, 늦은 나이에 소설가가 된 것은 개인사업에 실패한 후 실의의 늪에 빠진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필연이었다. 또한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상금 1천만 원을 타게 된 것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우연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당선 상금이 얼마며. 응모원고의 매수 제한이 어떤지는 불문하고,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우연히 발견한 부산일보 신춘문예 사고(社告)의 해양문학상이란 제목에 사로잡혀 무턱대고 투고를 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200매 가량의 중편소설이었는데 내가 제출한 분량은 무려 550매였다. 당시 문예부 기자였던 최학림씨는 그의 앞에 망연히 서 있던 내게 심사위원들이 다 알아서 할 거라며 애써 안심시켜 주었는데, 젠장, 바보 같은 짓을 했다며 자책의 수렁에 빠져 있던 나를 구해준 이들은 바로 심사위원이었던 천금성 소설가와 해양대 구모룡 교수였다.

어쨌거나 글을 쓴다는 일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보다 유익하고 행복한 삶을 희구하는 자연인의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의지이기도 하다. 전자는 개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수단적 가치이고 후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작가로서의 궁극적 가치일 것이다.

 

 

1. 바다의 길목

고등학교를 문과반으로 졸업했던 나는 그 옛날 멸치어장의 망쟁이(어로장)였던 아버지를 추억하며 부산수산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1970년대 초 우후죽순처럼 탄생한 운양어업회사를 마중하듯 이전의 경제학과가 경영학과로 이름이 바뀐 것인데, 소위 뱃사람이라 일컫던 선장과 기관장 등 해기사를 양성하는 어로학과나 기관학과가 아니었다. 내 요량으론 그때 수산회사의 사무직원이라도 된다면 뱃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바다의 얘기를 무진장 들을 수 있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원양회사 입사는 그저 입에 떨어지는 낙과가 아니었다. 그 당시 조직이나 규모면에서 기업이라고 할 만한 회사는 한국수산개발공사나 고려원양이 유일했고 그 뒤를 쫓아 동원산업, 동원수산, 오양수산 등이 열심히 사세를 키우고 있었지만, 그 외 대부분의 원양회사들은 배 2-3척을 운영하는 소규모 신흥기업들이어서 그 당시 발흥하던 종합상사나 은행처럼 대졸자를 대상으로 한 공개채용이 전무했다. 다만 수대 졸업생으로 수산회사에 채용되는 경우는 해기사 자격증을 갖춘 어선 선장이나 항해사들이 유일했다. 바다와, 즉 어장과 배를 알아야 사무관리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졸업 후 소도시 상업고등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했던 내가 이듬해인 1979년, 한국수산개발공사(이하 ‘수개공’이라 칭함)에 전격 입사하게 된 것은 회사에서 추진하던 한・미 어로공동사업이란 프로젝트 덕분이었다. 구인 요건이 영어가 능숙한 수대출신이었던 것이다. 보수와 상관없이 수산회사는 내겐 꿈에 그리던 직장이었다. 영작이나 독해에 줄곧 A학점을 받았던 내가 영어라면 두려울 것 없다며 면접에서 허풍을 떤 것이 주효했던 탓이리라. 공동어로사업이라 함은 미국어선이 잡은 어획물을 한국의 공모선이 양상에서 인수하여 가공만 하는 어로형태를 말한다.

 

내가 소속된 부서의 명칭은 해외협력사업부였다. 그 부서엔 외국과 체결한 어업협력사업에 투입된 선박과 냉동운반선과 괌 어장의 건착시험조업선 등 특수선을 대상으로 선박운용관리를 하는 선장 출신 과장만 3명이 있었다. 나의 급선무는 대미(對美)사업의 담당자로 공동어로사업의 실행에 따른 계약서 초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미국 대방사(對方社)와 주고받는 텔렉스(Telex)의 길이만 회당 무려 1미터가 넘었다. 수신전보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고하고 그에 대한 회답이 나오면 영문으로 번역해서 내보내는 것이 나의 주된 임무였다. 잘 모르는 해사용어(海事用語)는 선장 출신인 선배들의 도움을 얻어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처럼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조업 상황을 눈앞에 그려가며 산업현장의 실무영어를 몸에 익혀가는 재미에 빠져 나는 매일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쳐왔다. 멕시코 정부와의 합작사업인 북양의 명태트롤선과 멕시코 캘리포니아 연안의 가다랑어 채낚이어선의 선장으로 선배 과장 두 명이 각각 차출되는 바람에, 그들이 맡았던 모든 업무가 그만 내 무릎에 떨어졌던 것이다. 곧 선박운항관리 업무가 그것인데, 각 어장에 출어한 선박으로부터 날아드는 전문을 통해 매일 선박 동태를 파악하고 특별한 경우 그에 상응한 적절한 지시나 지원사항을 조치하는 일이었다. 특별한 경우라면,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불의의 사고나 선박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행정 사항들이었다. 운항관리부서에 선장 출신이 왜 꼭 필요한지 그 이유를 납득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출근을 하자마자 처리해야 하는 선박 전문 수신 업무는 단지 읽었다는 서명만 하고 뒷일은 트롤어선 선장 출신인 C 과장에게 넘길 뿐이었다. 나보다 열 살 연상이었던 그 과장 또한 갑자기 밀어닥친 업무량에 과부하가 걸리자, 꾀를 내어 어선과 먼바다에 생면부지인 나를 그의 제자삼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과목은 선박과 업종별 어구의 구조에 관한 이해와 이와 관련된 해사용어였다. 첫걸음부터 원시림을 헤쳐 나가는 고난이었지만 한편으론 이것이 바로 산지식이다. 라며 나는 기꺼워했다. 회사직무란 모르면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그런 일이 누적되면 직장에서 필경 도태될 뿐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공부는 일취월장이었다. 그 이면엔 내가 스스로 터득한 독학이 큰 몫을 했다. 나는 해사 업무에 관한 총론보다 각론이 우선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일요일마다 혼자 회사에 나와 해도를 펼쳐놓고(해도를 펼친 것은 선박의 정오 위치를 찍어 어장에서의 궤적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업종별로 최근 몇 년 치 선박 전문 파일을 하나씩 펼쳐가며 배의 일거수일투족을 읽어 나갔다. 생경한 용어는 놓치지 않고 메모를 해서 다음 날 선생에게 물었다. 이렇듯 업종별 어선들의 조업개요와 특징, 어장에서 발생하는 특수상황과 이에 따른 대처내용 등을 머릿속에 면밀하게 담아 나갔다.

 

…………(하략)…………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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