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현 선장의 ‘윤한봉 망명 밀항기’

등록일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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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현 선장의 ‘윤한봉 망명 밀항기’

이재우 I 수필가

 

 

올해에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주모자로 지목된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尹漢琫)을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밀항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항해 기록이 있다. 세계의 해양문학 작품 중에서 이와 같은 소재(素材)가 담긴 글을, 과문(寡聞)한 탓일지 몰라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열렬한 민주화운동가인 한 젊은 항해사(航海士)가 위험을 무릅쓰고 마산항에서 윤한봉을 선내에 잠입시켜 호주 북단의 헤이포인트항을 거쳐 미국 시애틀의 벨리햄 항까지 장장 35일간의 기나긴 항해 끝에 망명밀항에 성공한 생생한 항해기록이다.

필자인 최동현(崔東炫)은 1977년에 목포해양대학교 항해학과를 졸업하고 갑장(甲長, 갑종선장, 현행 1급항해사) 면허증을 취득한 후 외항선 선장의 경력을 쌓았으며, 여수에서 (주)영신해운(永信海運) 회사를 창립, 경영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최선장이 3등항해사로 승선 중이었던 시절에 겪은 숭고한 희생정신이 깃든 청춘과 바다의 모험기록이다.

이 망명밀항기는 해상생활의 실제 경험(real experience)을 바탕으로 쓴 사실의 기록(record of fact)으로 진정한 해양문학(sea literature)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항해경험 없이 탁상에서 관념적으로 쓴 해양문학 작품(나는 이런 작품들은 외람된 말이지만, 해변문학(海邊文學, seaside literature)이라고 차별화하고 있지만)과는 사뭇 다르다.

해양문학은 소설, 모험소설, 전쟁기록문학, 소년문학, 다큐멘터리, 탐험과 모험의 기록, 그리고 시, 수상, 희곡, 기행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해전기록, 탐험과 모험의 기록, 항해지(航海誌) 등에서 많은 수작(秀作)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망명을 위한 밀항 항해기록은 공전절후(空前絶後) 할 것이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풍토(風土)가 이색적이고 진귀한 이 문학작품을 탄생케 한 배경이 되었다.

「문인(文人)은 시대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시대적 배경을 역력하게 묘사한 이 작품을 통해서 체험하기 어려운 해상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국내의 사정으로 이 글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출판사 (주)창비에서 펴낸 ≪윤한봉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펴낸이 : 안재성, 2017.4)의 「제3장 망명 1981 태평양」에 일부 소개된 바 있는데, 출판에 앞서 2016년 1월 14일부터 5월 26일 사이에 열린 「집담회의」에서 「최동현의 윤한봉 밀항 구술」의 녹취문을 자료로 정리한 것이다.

2019년에 최동현의 모교인 목포해양대학교 23기 동기생(同期生) 21명이 학교졸업 45년 기념으로 펴낸 ≪청춘의 바다≫에 처음으로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광주지역의 방송국에서 5‧18 민주화운동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송한 일도 있는데, 이 제작에 요긴한 핵심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간담을 서늘케 하고 마음을 졸이게 하는 스릴(thrill), 독자에게 주는 불안감과 긴박감이 넘치는 서스펜스(suspense), 폭풍 전의 고요 등을 겪으며 교착하는 공포와 환희, 그런 가운데 드디어 소망의 항구(所望의 港口, desired haven)에 무사히 입항, 상륙 탈출에 성공, 해피 엔드(happy end)로 끝을 맺는다.

풍도(風濤)의 바다에서 심신이 시달리며, 지칠 대로 지치면서 비밀을 유지하기 어려운 선내 생활 환경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햇빛 한 번 쐬지 못한 채, 오직 비상 식품만으로 35일간 버텨낸 초인간적인 승리를 거둔 고난과 인내의 기록이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빈틈없이 계획하고 수행한 젊은 항해사, 최동현은 뛰어난 기지와 상황 판단력으로 반복되는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면서 항시 긴장과 경계 속에서 망명자의 안위(安危)를 걱정하고 고된 당직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가식 없는 사실의 기록으로서 사적(史的) 가치가 있는 희한한 뒷이야기-behind story-라고나 할까.

고래(古來) 바다는 재미있고, 황홀케 하는 매력의 원천(源泉, a source of fascination)이요, 찬연(燦然)히 반짝이는 부서지는 파도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사랑을 받는다. 최동현의 이 글에서는 기상(氣象), 해상(海象), 풍도(風濤) 등의 기술은 보이지 않고, 선내생활, 등장인물의 성격 등, 흥미를 돋우는 수식적 표현도 찾아 볼 수 없다. 절박, 긴장, 경계, 비상사태 대비 등, 예측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화조풍월(花鳥風月)을 읊은 서정적인 묘사를 할만큼 여유 있고 낭만적인 항해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항해담(航海談)에서는 장광설을 늘어놓기 일수인데, 관용적 표현으로 「spin a yarn」이 있다. 실타래를 풀 듯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이어간다는 뜻이다. 허풍 섞인 이야기(a fish story)도 많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바다와 배라는 무대인데도 이런 점에 대해서는 한 줄도 없다. 수식적인 군살은 사실의 생생한 기록의 초점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간결하고 짧게 기술해 나감으로써 긴장감, 절박감을 잘 나타내고 있고, 이 기록의 본뜻을 훼손치 않고 살리고 있다. 소복(素服) 차림의 여인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는 듯이 정적이 흐르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공포와 환희가 오버랩되고 있다.

항해와 정박 중에 일어나는 일은 항해일지(航海日誌, log book)에 간결하고 정확한(concise & accurate) 독특한 문체로 기입하는데, 필자가 해상생활에서 익힌 항해일지 기입법(log book keeping)의 영향을 받은 점이 눈에 띈다.

허만 멜빌(H. Melville)의 대작 󰡔백경(白鯨, Moby Dick)󰡕은 마지막 삼일 동안의 추적(the final three days of the chase of Moby Dick)을 하는 장편소설이다. 최동현의 밀항기는 35일간의 기나긴 항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불과 몇 쪽에 적고 있지만 정확한 기록으로서의 가치성이 매우 높은 사적(史的) 자료다.

고래(古來) 문학의 무대는 바다였다. 떠나감이 없는 문학은 없다.(no literature without a departure). 그 떠나감은 육지에서 바다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떠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의 무대 또한 바다다. 입항을 기약할 수 없는 전도 미지의 항해다. 배가 움직이면 세계가 움직인다.

레퍼드(Leopard) 호의 항해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했다.

육지를 떠난 후에는 해상생활은 주어진 여건하에서 헤쳐나가는 자기 완결성(自己完結性)을 요구한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항해 환경에서 정확한 판단으로 모든 일은 해결해야 한다. 망명자의 생활을 돌보기 위해서 필자는 슬기롭게 대처해 나갔다.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항거하는 일은 용서치 않는 대자연 바다의 위력, 넵츈(Neptune)해신의 도움으로 목적항에 입항, 상륙 탈출에 성공했다.

망명자를 탈출시키는 데 도움을 준 미국의 조력자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무사한 항해와 여기 같이 모인 사람들과 이 식사를 같이하며 기쁨을 나누는 이 자리를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빛이며, 우리를 인도하소서.」

 

이 귀중한 항해기록이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말았다면, 정말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 될 뻔했을 것이다.(It would have been a pity, had this log been lost on the wind.)

최동현 선장의 아들도 해양대학을 졸업한 해양가족이다. 최선장은 5‧18민주화 유공자요, (사)여수지역발전위원회 이사장으로 지역사회를 지키고 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오늘의 세태(世態)에서, 진정한 선원 정신을 보여준 작가, 최동현 선장에게 찬사를 보낸다.

 

[ 망명 밀항기 ]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을 밀항시키다*

 

세기적 사건, 윤한봉 밀항 탈출에 함께 하다. 

나는 1980년 군사독재 전두환 계엄 정부의 1급 수배자, 윤한봉을 미국으로 밀항 탈출을 시도한 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한몫했다.

윤한봉은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마산항에서 선내로 잠입해 호주 북단 헤이포인트 항을 거쳐 35일간의 긴 항해를 하면서 미국 시애틀의 벨링햄 항까지 밀항한다. 이 세기적 사건이라 할 만한 윤한봉 밀항에 함께 하면서 겪은 생생한 이야기를 적어 본다. 

 

광주 5.18의 참혹한 현장 목격

나는 노르웨이 선주의 선박회사 소속 유조선의 2등항해사로 승선한 계약을 종료하고 귀국하여 광주에서 휴가를 보냈다. 때는 1980년 5월, 당시 광주 시내에서는 5월 17일을 기점으로 학생들의 데모 진압을 하기 위해 계엄군 (공수부대)이 대거 투입된다.

내가 공수부대의 만행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 것은,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던 막냇동생이 17일부터 행방불명이 되었기에 동생을 찾느라 이곳저곳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시작된다. 전남대병원, 기독재중병원, 도청, 상무관 등, 부상자나 시체가 있는 곳은 다 찾아다녔다. 이 과정에서 시민군과 합류하기도 하였고, 공수부대가 시민들에게 총, 칼, 몽둥이로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현장을 수없이 맞닥뜨리며 치를 떨어야 했다.

 

선원수첩의 위력

선원수첩이 계엄군들의 살벌한 경계를 뚫고 다닐 수 있는, 정부의 신분 보장을 받은, 마패가 되었다. 나는 정장 차림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광주 시내의 이곳저곳을 쫓아다니면서, 계엄군들이 검문하면 신분증으로 선원수첩을 들이댔다, 겉면에 무궁화가 표기되어 있고, 대한민국 글자는 금박 입히고 펼쳐보면 영어, 아랍어, 일본어 등, 출입국 인장이 빽빽하게 찍혀 있으니 무지한 군인에게는 정부의 꽤 높은 외교관쯤으로 생각하는지, 기가 죽어 경례하고 바로바로 통과시켜 주기 일쑤였다.

밀항을 계획 결의하다

특급 수배자 윤한봉은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전두환의 계엄 정부에 의해 “광주폭동의 수괴”로 지목됐다. 당시 살벌한 분위기에서 잡히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도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광주의 참혹한 사태를 현장에서 목격한 나는 고향인 보성으로 내려가, 민청학련, 난민전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어, 잠시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들과 만나 광주항쟁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선배들은 외항선 항해사인 나에게 엄청난 제안을 한다.

“5.18의 진실이 묻히고 왜곡 돼서는 안 된다. 광주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해외에 운동 거점을 만들기 위해 1급 수배자 윤한봉 외 한두 사람을 더 해외로 도피시키자.”

당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엄혹한 군부독재 치하에서 민주화 투쟁에 기여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일을 제안한 것이다. 그렇게 밀항 모의가 시작됐다.

그러면 어디로 도피시킬 것인가. 작전이 쉬운 일본이 먼저 거론됐다. 그러나 일본은 사민당에 협조를 구해야 되고, 그러다 북조선에 선이 연결되기라도 하면 간첩으로 몰릴 위험이 있었다. 결국 일본을 포기하고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기로 했다. 나는 그해 10월부터 미국이나 캐나다에 정기적으로 다니는 배들을 알아보러 다녔다.

밀항을 함께 계획한 선배들을 만나 윤한봉 잠입과 탈출, 그리고 항해 중 계획을 설명하고 100퍼센트 안전하게 임무 완수 가능하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는 마지막 하역지인 마산항에서 윤한봉 형을 선내에 잠입시키기로 결정했다. 곧바로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에서 연락책임자를 만나 작전에 필요한 암호, 비상사태 등, 돌발사태에 대응할 조치를 협의했다. 비상자금과 윤한봉 형의 미국 일시 체류에 사용할 자금도 건네받았다.

밀항계획에 참여한 대다수 사람들은 수배 중이거나 정보기관의 감시 대상자들이다. 그래서 만나는 것도 아주 은밀해야 한다.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승선 취업과 밀항 출정식

해가 바뀌어 81년 2월, 목포해양대학에 재직 중인 최 모 교수의 소개로 한국-미국 시애틀-칠레를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삼미해운의 35,000톤급 원목 운반선 레퍼드(LEOPARD) 호에 승선하게 됐다. 2등항해사로 갈 수도 있었지만, 자원해서 3등항해사직을 택했다. 밀항 때 화장실이 붙어 있는 선내 병실(환자격리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3등항해사직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진해항에 정박 중인 레퍼드 호에 승선하니 때마침 후배인 정찬대(목해대 기관학과 24기)가 2등기관사로 승선하고 있었다, 정찬대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선배 정찬용(전. 청와대 인사수석)의 친동생이기도 하고 뜻을 함께할 수 있는 동지적 후배였다. 우리는 서로 반갑기도 했지만 우연한 조우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광주 5.18 1급 수배자, 윤한봉을 미국으로 밀항시키려고 이 배를 탔다고 하자 후배인 정찬대도 뜻을 같이 하기로 했다. 윤한봉의 미국 밀항을 하늘이 돕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략)…………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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