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지도가 이끈 꿈과 모험의 세계

등록일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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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지도가 이끈 꿈과 모험의 세계

- Robert Louis Stevenson의 「보물섬」을 읽고

이종무

 

 

한 번쯤 보물찾기를 꿈꾼 사람들을 위해 만든 지하수 펌프 같다. 뜨거운 태양에 맞서 백 미터 아래의 시원한 물로 등목을 감는 여름날의 풍경이랄까. 시골 옛 마당에 마중물을 넣고 수동으로 펌프질하면 여름날의 태양도 먹어주는 추억이 있었다. 감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읽었던 기억이 선선하게 다가왔다.

‘죽은 자의 궤 위에 열다섯 사람 어기여차, 럼주 한 병!’

럼주를 알 리 없는 어린 마음마저 흥얼거리게 만들고 또한 취하게 했다. 지나고 생각하니 꿈이었기에 행복한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책이었다. 보물을 찾아 나서지도 않았지만, 마음속 한 칸에는 항상 모험의 세계로 떠날 준비를 했는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를 위한 명작으로 기억하고 있던 꿈이 어른이 되어서도 유효한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삼국지는 어린아이 때 읽은 것과 청소년 때 읽은 것 그리고 어른이 되어 읽은 것 모두가 다르게 다가온다고 했다. 보물섬 역시 그럴만한 보편성과 항구성을 갖추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니면 내가 아직도 꿈과 모험을 간직하고 있는지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너무 몰아세운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공 짐 호킨스가 어린 나이로 수백 킬로미터 대양을 항해한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해적이 에워싸고 있는 요새를 빠져나와 히스파뇰라호의 닻줄을 끊고 그들과 맞서는 모습은 상상에 상상을 더하는 것이었다.

모험심이란 것이 어릴 적 동화 수준을 원작이라고 읽고 까마득히 숨겨두고 잊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다행히 책방 한구석에 오래된 보물 지도처럼 먼지를 뒤집어쓴 책을 발견하기까지는 말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라는 작가의 이름도 생소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알아도 작가의 이름을 몰랐던 것과 같다. 세월이 흘러 벌써 하나를 건진 것 같은 느낌이다. ‘벤보 제독’이라는 이름의 외딴 여관에 늙은 뱃사람이 나타난 것부터 괜찮은 출발이다. 보물섬을 향해 배가 출항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신분을 숨긴 외다리 요리사 존 실버와 해적 무리도 마찬가지다. 모험심은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가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진정한 모험가가 되는 것이다.

모험에는 꼭 필요한 장치가 있다. 바로 지도다. 그냥 지도가 아니라 보물섬의 지도이다. 그것도 짐 호킨스의 여관에 묵었던 빌리 본즈 선장의 궤짝에서 나왔다. 선장은 몸이 안 좋으면서도 항상 럼주를 마셨다. 마치 해적의 상징이라도 되는 듯이. 게다가 그는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노래가 있었다.

‘죽은 자의 궤 위에 열다섯 사람 어기여차, 럼주 한 병! 나머지는 술과 악마가 이미 해치웠네. 어기여차, 럼주 한 병!’

단순한듯하면서도 상징성이 있어 보이는 노래다. 마치 자신이 가져온 궤짝을 예언하는 듯하다. 물론 어릴 적 여름날에 평상에서 읽었던 내용과는 기억에서부터 달랐다. 아니 기억에 없었거나 흥미 위주의 각색된 내용이었을 것이다. 또는 만화 영화의 탓도 있었을 것이다.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삼국지처럼 커서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 확정되었다. 궤짝 속에 담긴 지도를 쟁취하기 위해 검둥개라는 암호 같은 이름의 해적이 등장하고 흑점이 나타난다. 이름에서부터 호기심을 가질만한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배려라기보다는 이름 노출을 꺼리는 해적의 속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적이라는 것이 원래부터인지는 몰라도 단어에서 풍기는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적에 맞으면 뭉치고 그렇지 않으면 서로 죽고 죽이는 존재가 해적이다. 보물이라는 인간의 욕망을 위해 해적들은 그들의 선장인 존 실버도 제거하려 한다. 플린트 선장의 보물은 섬에 버려진 벤 건이라는 인물에 의해 이미 몇 년 전에 파내어져 숨겨진 상태가 된 것이 이유였다. 즉 황금에 눈먼 해적에게는 그 누구도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리브지, 트렐로니, 스몰릿 선장 등 개성 넘치는 인물의 등장 역시 흥미롭다. 해적들과의 승부는 알고 있는 바대로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보물이 숨겨졌던 지도상 위치에 어떻게 이동했는지 왜 존 실버와 해적들이 서로 갈라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했었다.

통나무집 요새에서 해적 두목 존 실버의 포로가 된 짐 호킨스와 의사인 리브지 일행이 항복하고 식량과 지도를 해적들에게 넘겨주고 사라진 까닭이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간 부분이었다. 해적들이 보물 구덩이를 팠을 때 나온 금화 2기니는 어쩌면 통쾌하기까지 했다. 실버는 여기까지 예상하고 외다리로 무거운 총을 들고 숨을 헉헉거리며 올라왔는지도 모른다. 소설의 백미였다. 황금을 예상하고 왔지만, 황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게다가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등장하는 의사, 그레이, 벤 건이 육두구 숲에서 나온다. 전광석화 같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알고 보니 리브지 일행이 통나무집 요새에서 항복하고 사라진 까닭이었다. 해적들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안겨 주기 위해 준비한 일이었다. 거기에 짐 호킨스가 말려든 것이다. 모험 소설에서 이런 묘미가 없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냐 싶은 대목이다.

해적 이야기가 묘미라면 짐 호킨스에게는 성장 소설이다. 아니면 존 실버라는 인물이 어떻게 달라지는 가에 대한 갈등의 문제 같기도 하다. 카리브해에서 펼쳐지는 해양 소설인 것은 맞지만 무인도라는 보물섬에 한정된 선악의 대결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개성 넘치는 다양한 인물과 보물이라는 소재를 통해 모험의 세계로 이끌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존 실버 역시 카리브해의 어느 항구에 히스파뇰라호가 정박했을 때 보물섬에서 가져온 금화 한 자루를 훔쳐 사라졌다. 아마도 흑인인 부인과 살 것이라는 추측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강점은 역시 빠른 이야기 전개다. 장편임에도 지겨운 느낌이 없다. 어릴 적 읽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항상 비교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내심 꿈과 모험이 그대로 유효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원동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마력이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다. 숨겨져 있던 꿈과 모험의 세계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열정이 있다면 삼국지가 아니라 더한 소설을 읽더라도 항상 새롭게 다가올 것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다. 책장을 다 덮고 나서 무의식중에 흥얼거렸다.

‘죽은 자의 궤 위에 열다섯 사람 어기여차, 럼주 한 병! 나머지는 술과 악마가 이미 해치웠네. 어기여차, 럼주 한 병!’

나는 럼주를 한 번도 입에 댄 적은 없다. 그러나 보물섬을 통해 마시지도 않고 취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지도 한 장에서 영감을 얻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도 훌륭하거니와 그가 창조한 인물들을 책장을 되넘기며 짚어 보았다. 짐 호킨스, 존 실버, 데이비드 리브지, 존 트렐로니, 앨릭샌더 스몰릿, 앵무새 플린트 선장, 빌리 본즈, 벤 건과 해적 등의 이름을 말이다. 다시금 꿈 많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세계 지도를 펴자, 어기여차.’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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