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선박(船舶)

등록일2020-10-19

조회수115

 

아침 선박(船舶)

 

 

 

1

 

아침 바다는 예지에 번뜩이는 눈을 뜨고

끈기의 저쪽을 달리면서

 

시대에 지치지 않고, 처절했던 동반의 때에

쓰러진 시간들을 하나씩 깨워 일으키고

저, 넘쳐나는 지평의 햇살을 보면

청명한 날에 잠 깨는 출항.

 

세수를 일찍 끝낸 여인들은

탄생을 되풀이한 오랜 진통에

땀 배인 내의를 벗어 바다에 던지고

파이프에 남자들은 두고 온 연대(年代)를 열심히 피워 문다.

 

2

 

철저한 자유를 부르면서

흐느끼는 심연 그 움직이는 고요.

가파른 정오의 한때를

 

이해만이 남고 오직 진행이 있을 때

당황하던 파도를

식욕을 거느린 별들이 주워들고 멀리 떠났다.

험한 해협엔 그러나

의지를 철썩이는 잔잔한 파도의 무료

밤 새워 해변을 지키던 새의 사연은 남고

순수의 깊이에서 일어서는 서적들의 눈부신 항변

 

-아직 침실에 누워 있는 자들도 한 번은 떠날 것이다.

휴식의 때가 오면 패배의 옷자락을 가다듬을 꼭 가다듬을

늙지 않는 아우성, 동족을 꺼려하는

쓸쓸한 시선들도

한 번은 떠날 것이다.

 

3

 

우리에게 주어진 한 개의 원인은

서성이는 곳에 쓰러지지 않는 거만한 거부.

타협이 없는 거리를 글쎄

걸어갈 수 있을까?

 

신앙은 놓이고 길을 가는 의문의 날에

찾아 온 제 3의 치맛자락에 매달린 식탁

어지러워라

천둥이 울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의 식탁은 없을까?

쟁취의 이빨을 내놓기 전

낮에도 눈이 잠긴 암초의 눈을 뜨게 할 순 없을까.

 

겨울을 빠져 나온 꽃들이 찾아가

피어날 꽃나무는 없을까.

계절이 없어 과일들은 익질 못한다.

 

4

 

획득의 눈이 내리고 있다.

학동들의 꿈길에서 얻어진

멀고 먼 나라의, 가까운 은혜가 흩날리고 있다.

 

아침 인사를 받으면서 물어 앉은 산

아침 인사를 받으면서 오후가 되더라도 피로하지 않을

하이얗게 움직이는 선박이 있다.

 

우리 젊은 우울한 선장에겐 무엇을 바칠까?

우리의 모국어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진 나침반을

우리의 눈에 맞는 색깔의 저 지평을 향해

펄럭일

기(旗)를 바쳐야 한다.

 

* ‘경향신문’, 1964년 1월 1일

* 조태일

* 한국명시(최동호편저) 하권 1739면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