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홍신선)

등록일2020-10-19

조회수107

 

 

 

흘러, 멈춘 것들 사이에서

공사장 철주 빔보다 깊이 삭아 멈춘 것들 사이에서

혼자 흘러, 안 보이게

뒤 끊고 좌우 끊고 혼자

숨어 숨어 흐르다 보면

 

늙은 회양목들 길 죄어 가는

단양, 낯모르는 남한강 지류에

그는 당도해 흐른다

눈도 귀도 아예 내놓지 않고

복면으로 엎드려 흐른다.

 

흐르다 갈라지는 마음 몇 굽이째 돌려 합치며,

혼자 행복하리라고 행세하리라고

기어오르다 쉬임없이 미끄러져 내리는,

다 닳은 손톱으로

돌아선 이 사람 저 사람 공간의 등 밀치고 할퀴어

멍도 내비치게 하는 나를

지명도 없이 떠도는 나를

웃으며 돌려 합쳐 주며

혼자 흘러 그는

 

귀때기 때리는 모랫바람

덤덤히 낡은 깃 올려 막고 섰는

담배밭 담배줄기 옆에

모습 드러낸다, 같이 어깨 대고 서기도 한다.

침묵 부수고 더 큰 침묵으로 솟는

빙폭 같은 대머리의

고요

마주 보고 선다.

 

이윽고 아래로 아래로

발과 발, 다리와 다시 서로 부딪치며

몰려 내려가, 몰려 내려가다

무슨 신바람 만들어 뛰고

솟구치는지

 

뉘었던 소리, 감추었던 힘,

고요에서

 

* ‘현대문학’, 330호, 1982년 6월

* 홍신선

* 한국명시(최동호편저) 하권 1811면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