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江)

등록일2020-10-19

조회수109

 

강(江)

구상

 

 

1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을 저어 가듯

태백의 허공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면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2

 

산들이 검은 장삼을 걸치고

다가 앉는다.

 

기도소의 침묵이 흐른다.

 

초록의 강물결이

능금빛으로 물들었다가

금은으로 수를 놓다가

원이 되었다가

 

이 또한 검은 망사를 쓴다.

 

강 건너 마을은

제단 같이

향연이 피어 오르고

 

나룻터에서

호롱을 켠 조각배를 타고

외론 혼(魂)이 저어 나간다.

 

3

 

강이 숨을 죽이고 있다.

기름을 부어 놓은

유순(柔順)이 흐른다.

 

닦아 놓은 거울속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마냥 깊다.

 

선정(禪定)에 든 강에서

나도 한으로 환해지며

화평을 얻는다.

 

4

 

바람도 없는 강이

몹시 설렌다.

 

고요한 시간에

마음의 밑뿌리부터가

흔들려 온다.

 

무상도 우리를 울리지만

안온도 이렇듯 역겨운 것인가?

 

우리가 사는 게

이미 파문이듯이

강은 크고 작은

물살을 짓는다.

 

5

 

강에 바람이 인다

진 갈매빛 물살이

이랑을 지으며

 

모래 기슭에

파도를 친다.

 

강도 말 못할 억울을

안으로 지녔는가?

보채듯 지절대며 사연이 많다.

 

하늘은 먹구름을 토하고

바람은 포목(布木)으로 휘감긴다.

 

창백히 질려 있는 사장(砂場)에서

길가가마귀떼들이 날아

비 안개 낀 산을 넘는다.

 

6

 

강에 은현의

비가 내린다.

 

빗방울들은 물에 번지면서

‘발레리나’가 무대에 인사를 하듯

다시 튀어 올라 광채를 짓고

저 큰 흐름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강은 이제 박수 소리를 낸다.

 

7

 

아지랑이가 아물거리는 강에

백금의 빛이 녹아 흐른다.

 

나룻배가 소년이 탄 소를

싣고 온다.

 

건너 사장에

말뚝만이

홀로 섰다.

 

낚시대 끝에

잠자리가 조은다.

 

멀리 철교 위에서

화통차가

목쉰 소리를 낸다.

 

-북간도로 가는가베?

 

풀섶에 갓 오른

청개구리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8

 

오월의 숲에서 솟아난

그 맑은 샘이

여기 이제 연탄빛 강으로 흐른다.

 

일월도 구름도

제 빛을 잃고

신록의 숲과 산은

묵화의 절벽이다.

 

암거를 빠져 나온

탐욕의 분뇨들이

거품을 물고 둥둥 뜬 물 위에

기름처럼 번뜩이는 음란!

 

우리의 강이 푸른 바다로

흘러들 그날은 언제일까!

 

연민의 꽃 한 송이

수련으로 떠 있다.

 

9

 

붉은 산굽이를 감돌아 흘러오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느 소슬한 산정 옹달샘 속에

한방울의 이슬이 지각을 뚫은

그 순간을 생각는다네.

 

푸른 들판을 휘돌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침내 다다른 망망대해,

넘실 파도에 흘러들어

억겁의 시간을 뒤치고 있을

그 모습을 생각는다네

 

내 앞을 유연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증화(蒸化)를 거듭한 윤회의 강이

인업의 허물을 벗은 나와

현존으로 이곳으로 다시 만날

그 날을 생각는다네.

 

10

 

저 산골짜기 이 산골짜기에다

육신의 허물을 벗어

흙 한 줌으로 남겨 놓고

사자(死者)들이 여기 흐른다.

 

그래서 강은 뭇 인간의

갈원과 명인을 안으로 안고

흐른다.

 

나도 머지않아 여기를 흘러가며

지금 내 옆에 앉아

낚시를 드리고 있는 이 작은 애의

그 아들이나 아니면 그 손주놈의

무심한 눈빛과 마주치겠지?

 

그리고 어느날 이 자리에

또다시 내가 찬미(讚美)만의 모습으로

앉아 있겠지!

 

암거 : 지하에 매설되거 지표에 있더라도 덮개를 한 도수로(導水路)

 

* ‘신동아’, 1969년 8월

* 구상

* 한국명시(최동호 편저) 상권 95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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