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江)
구상
1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을 저어 가듯
태백의 허공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면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2
산들이 검은 장삼을 걸치고
다가 앉는다.
기도소의 침묵이 흐른다.
초록의 강물결이
능금빛으로 물들었다가
금은으로 수를 놓다가
원이 되었다가
이 또한 검은 망사를 쓴다.
강 건너 마을은
제단 같이
향연이 피어 오르고
나룻터에서
호롱을 켠 조각배를 타고
외론 혼(魂)이 저어 나간다.
3
강이 숨을 죽이고 있다.
기름을 부어 놓은
유순(柔順)이 흐른다.
닦아 놓은 거울속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마냥 깊다.
선정(禪定)에 든 강에서
나도 한으로 환해지며
화평을 얻는다.
4
바람도 없는 강이
몹시 설렌다.
고요한 시간에
마음의 밑뿌리부터가
흔들려 온다.
무상도 우리를 울리지만
안온도 이렇듯 역겨운 것인가?
우리가 사는 게
이미 파문이듯이
강은 크고 작은
물살을 짓는다.
5
강에 바람이 인다
진 갈매빛 물살이
이랑을 지으며
모래 기슭에
파도를 친다.
강도 말 못할 억울을
안으로 지녔는가?
보채듯 지절대며 사연이 많다.
하늘은 먹구름을 토하고
바람은 포목(布木)으로 휘감긴다.
창백히 질려 있는 사장(砂場)에서
길가가마귀떼들이 날아
비 안개 낀 산을 넘는다.
6
강에 은현의
비가 내린다.
빗방울들은 물에 번지면서
‘발레리나’가 무대에 인사를 하듯
다시 튀어 올라 광채를 짓고
저 큰 흐름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강은 이제 박수 소리를 낸다.
7
아지랑이가 아물거리는 강에
백금의 빛이 녹아 흐른다.
나룻배가 소년이 탄 소를
싣고 온다.
건너 사장에
말뚝만이
홀로 섰다.
낚시대 끝에
잠자리가 조은다.
멀리 철교 위에서
화통차가
목쉰 소리를 낸다.
-북간도로 가는가베?
풀섶에 갓 오른
청개구리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8
오월의 숲에서 솟아난
그 맑은 샘이
여기 이제 연탄빛 강으로 흐른다.
일월도 구름도
제 빛을 잃고
신록의 숲과 산은
묵화의 절벽이다.
암거를 빠져 나온
탐욕의 분뇨들이
거품을 물고 둥둥 뜬 물 위에
기름처럼 번뜩이는 음란!
우리의 강이 푸른 바다로
흘러들 그날은 언제일까!
연민의 꽃 한 송이
수련으로 떠 있다.
9
붉은 산굽이를 감돌아 흘러오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느 소슬한 산정 옹달샘 속에
한방울의 이슬이 지각을 뚫은
그 순간을 생각는다네.
푸른 들판을 휘돌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침내 다다른 망망대해,
넘실 파도에 흘러들어
억겁의 시간을 뒤치고 있을
그 모습을 생각는다네
내 앞을 유연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증화(蒸化)를 거듭한 윤회의 강이
인업의 허물을 벗은 나와
현존으로 이곳으로 다시 만날
그 날을 생각는다네.
10
저 산골짜기 이 산골짜기에다
육신의 허물을 벗어
흙 한 줌으로 남겨 놓고
사자(死者)들이 여기 흐른다.
그래서 강은 뭇 인간의
갈원과 명인을 안으로 안고
흐른다.
나도 머지않아 여기를 흘러가며
지금 내 옆에 앉아
낚시를 드리고 있는 이 작은 애의
그 아들이나 아니면 그 손주놈의
무심한 눈빛과 마주치겠지?
그리고 어느날 이 자리에
또다시 내가 찬미(讚美)만의 모습으로
앉아 있겠지!
암거 : 지하에 매설되거 지표에 있더라도 덮개를 한 도수로(導水路)
* ‘신동아’, 1969년 8월
* 구상
* 한국명시(최동호 편저) 상권 95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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